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이라는 시간은 매일로 연결되어 결국 인생이라는 건축물을 쌓게 됩니다. 선지자들, 우리의 영적 지도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고,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셔서 그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 성전이 되어가라고 말씀해주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엡2:20-21).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포하신 사건을 통해 우리는 과연 어떠한 ‘오늘’을 살아야 하는지 상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갔다(눅19:4).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간 이유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자기가 키가 작다는 것을 핑계로 삼지 않고 뽕나무까지 올라갔을까요? 세리장이고 부자였던 그는 백성들의 백성들에게 죄인 취급을 당하며 미움과 멸시를 받는 가운데(눅19:7),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한 예수님 뵙기를 사모했습니다.
예수님을 뵙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가는 수고를 했던 삭개오와 같이 어떠한 수고도 담대히 이뤄낼 때 예수님을 뵐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했다(눅19:5-6).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수근거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중 ‘급히’는 헬라어로 ‘스퓨도’로 서둘다, 노력하다의 뜻으로써 어떤 기한이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서두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고후6:7, 시103:20)이 능력을 발휘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 자리에 기쁨으로 달려 나와 영접할 때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삭개오는 그 동안 쌓아왔던 것을 포기했다(눅19:8).
삭개오는 세상에서 자신을 나타내고 있었던 세리라는 권위에 대해 토색(돈이나 물건 따위를 억지로 달라고 함)한 일이라고 부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소유와 더불어 세상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고 있던 인간적인 존재의 가치를 예수님을 영접한 뒤 옳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사 배나 갚는 것으로 행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내 인생의 철학과 이론들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알려주고 계십니다(고후10:5, 시94:11, 롬12:3). 우리 또한 말씀을 영접하므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지는 평강의 청년들 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삭개오는 결국 눅19:9 말씀과 같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예수님께 인정받게 됩니다. 우리의 ‘오늘’은 어떠한가요? 천국에서의 영원한 오늘을 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요? 말씀을 만나기 위해 뽕나무를 오르고, 우리를 찾아오신 말씀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 결단을 가지고 고백할 때에 구원을 약속받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인정받는 모든 평강의 청년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 전도사 이명심
(그루터기紙 180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