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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자여 어찜이뇨?(욘 1:4-6)

오늘 본문에서는 요나가 탄 배가 대풍을 만나 바다에서 난파되기 직전의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과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는 전염병이나 홍수 등 끊임없이 우리 삶의 항해 가운데 만나게 되는 풍랑과 위기를 이기는 비결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종교적 해결책 - “각기 자기의 신을 부르고”(욘 1:5)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를 만날 때, 일반적으로 종교적 해결책에 의지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사공들은 각기 자기들이 믿는 신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의 근원인 ‘대풍’은 여호와께서 바다에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바람을 다른 신들이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갈멜산 상에서 바알 선지자들이 온종일 큰 소리로 부르짖었지만 아무 응답이 없던 것과 같습니다(왕상 18:28-29). 첨단 과학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러한 종교적 해결책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인생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2. 과학적 해결책 -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욘 1:5)


배가 풍랑을 만날 때, 짐을 버려 몸집을 가볍게 하는 것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조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어느 정도 범위에서만 효과가 있을 뿐입니다. 사도바울이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날 때도 바다에 배의 기구를 내어버린 적이 있으나(행 27:18-19), 이것도 위기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은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과학은 우리에게 필요하고 많은 유익이 되지만,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과학의 범위를 벗어나서 발생하는 문제로 인해 위기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의 방법 - “네 하나님께 구하라”(욘 1:6)


배가 파선의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 요나는 현실을 외면하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때 선장은 ‘자는 자여 어찜이뇨?’라며 잠든 요나를 깨우며 하나님께 간구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도의 사명과 문제해결의 방법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고. 처한 위기를 외면하고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요나를 향한 선장의 외침을 우리는 오늘날 나를 향한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일어나서 위기의 극복과 문제해결을 위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해결책입니다.

끊임없는 위기의 파도와 풍랑이 몰아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요나처럼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서 그들에게 평화와 위로의 말씀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제는 안심하라!”(행 27:22-25)라며 배에 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전한 것과 같은 사명과 역할이 필요합니다.

이 땅에 풍랑뿐 아니라 지진과 기근과 질병 등 수많은 위기가 초래됨으로 인해 만물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위기와 탄식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들뿐입니다(롬 8:19-20).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오늘도 ‘자는 자여 어찜이뇨?’ 외치며 사명의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ㅡ 그루터기紙 1912호

조현우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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