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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교회, 시글락 (삼상 7:1-7)

‘교회란 무엇인가?’ 우리는 늘 이 질문을 마음에 새기며 합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는 1) 말씀을 선포하는 곳이며, 2) 신앙훈련의 장소이자, 3) 천국의 모형입니다. 교회를 통해 ‘현재’ 천국의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데반 집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광야교회’(행 7:38)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10년간의 도피 생활 중에서 따르는 많은 무리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함으로써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아둘람 굴(삼상 22:1-2) - 위로하는 교회


사울의 추격을 피해 다윗이 아둘람 굴로 도망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400명이나 되는 무리가 다윗과 함께했습니다. 도망자의 입장에서 무리가 커지는 것은 전혀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면면을 보면 ① 환난 당한 자 ② 빚진 자 ③ 마음이 원통한 자들로서, 다윗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이 되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들의 ‘장관’이 되어 그들을 수용하고, 책임졌습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도망자를 향해 몰려들도록 했을까요? 이는 다윗이 그들의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원통함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위로해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아둘람 동굴은 ‘위로하는 교회’의 표상입니다.



2. 시글락(삼상 27:2, 6) - 부흥하는 교회


‘시글락’은 블레셋의 영내에 있는 지역으로 아기스 왕이 다윗의 일행을 위해 내어준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옮길 때 다윗의 일행은 600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둘람 굴에서 200명이 더 늘어난 것입니다. 대상 12:20-22에 보면 다윗이 시글락에 있을 때 므낫세 지파에서 천부장들이 나와 다윗을 도와 적당을 쳤고, 그들이 다 큰 용사와 군대 장관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나아가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위로가 있을 때 이처럼 다윗의 교회는 날마다 부흥하였습니다.



3. 브솔 시냇가(삼상 30:1-25) - 화평의 교회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투가 벌어질 때, 참전했다 되돌아온 사이에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공격해서 불태우고 모든 물건과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되돌아온 다윗의 일행은 그들을 추격하던 중 브솔 시냇가에서 200명의 낙오자가 짐을 지키고 있고, 400명을 인솔하고 되찾아왔습니다. 이때 일부 ‘악한 자들과 비류들’은 200명과 함께 소유를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이제 능력 있는 자와 약한 자로 분열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삼상 30:23-25)하며 동일하게 노략물을 나누게 함으로써 화합을 이루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능력 위주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능력을 떠나서 모든 구성원이 함께 위로받고 화합하며 화평을 나누는 곳입니다. 다윗의 공동체를 이를 직접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교회의 참된 지표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ㅡ 그루터기紙 1879호

홍봉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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