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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일을 알 수 있다면-모세가 바라본 변치 않은 미래 _행 7:17-37

# 우리는 오늘 속에서 내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출애굽 임박-‘하나님의 계획된 430년의 기간’, 행 7:17-20), 그 때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이스라엘의 번성을 두려워하며 고역과 남아학살로 영구적 노예화 시키기를 꾀하였고 그 때에 모세가 출생하였다(주전 1526년).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섭리로 애굽에서 바로의 딸의 아들로서 40년간 자라면서 ① 친모 요게벳을 통해 선민의식과 여호와의 신앙을 전수 ⓶ 바로 궁정에서 최고 학문과 기술, 군사, 건축, 종교에 관한 교육을 받아 ‘말과 행사가 능한’(행 7:22)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춤 ⓷ 장년이 되면서 자신이 히브리 민족을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시켜 구원해야 할 지도자라고 자각했다(‘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출 2:11, ‘동포’-출 2:13). 그렇다면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펼쳐진 자신의 내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행했는가?


1. 모세가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본 내일

(1) 장성한 후에(출 2:11), 나이 사십이 되매(행 7:23) 민족을 돌아볼 생각을 함

(2) 그러나 백성들의 생각과 맞지 않았다(행 7:23-25).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향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지도자, 중재자)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출 2:14, 행 7:27)하며 모세를 거절하고 바로에게 고발했다. 모세가 스스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지도자로 일어설 때, 백성들도 자신을 지지하며 일어서리라 생각했지, 내일 국사범이 되어 도망자 신세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계획하고 준비한 시간을 모세는 조급함과 혈기와 잘못된 방법(살인)으로 내일을 이루려 한 것이다.


2. 하나님이 보여주신 내일

(1)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기간(히 11:24-27)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 기간은 ①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호화롭고 평안하며 죄악의 낙을 누렸던 삶을 정리 ⓶ 자신의 혈기와 조급함을 다스리며 온유함으로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견디며 그들을 이끌 지도자로 다듬어지는 연단의 기간이었다.

(2)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차매, 하나님은 4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관원과 재판장”으로 거절당한 그 모세를 이스라엘의 “관원과 속량자(구원자)”로 보내셨다(행 7:34-35). 이제 모세는 혈기와 조급함이 아니라 온유와 사랑으로 백성의 마음을 돌이키고, “믿음으로” 신령한 내일, 영원히 변치 않는 내일을 바라보며 백성들과 함께 오늘의 고난을 감수하면서 즐거워했고,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고 가나안으로 인도했다.

결론 : 자신의 과거를 정확히 알고, 현재, 오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내일의 미래를 내다보는 눈을 가지게 된다.

모세는 애굽의 궁정보다 보이지 않는 내일, 천국을 바라보았고, 바로의 공주의 아들의 칭호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세계를 바라보았으며, 보이는 애굽의 권세보다 내일의 왕 같은 제사장의 권세를 바라보았다.

우리도 자신을 정확히 보고 회개하고 오늘의 은혜 속에서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내일을 바라보며 순종하며 나아가자!


오인정 전도사

2021년 02월 21일 정기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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