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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를 남겨두라 (단 4:26-27)

그루터기 창립 40주년을 맞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우리에게 ‘그루터기’라는 이름을 주신 의미에 대해 본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루터기’의 의미 - 회복의 씨앗이자 심판의 상징


사 6:13에서 “밤나무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라는 말씀을 볼 때 ‘그루터기’는 하나님의 심판의 배경에서 나옵니다. 온전한 나무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다 베어지고, 겨우 밑동만 남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루터기’가 회복과 소망의 상징이 된 것은 그 남은 그루터기를 통해 다시금 이전의 모습과 영광을 회복시켜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루터기를 통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그루터기’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심판과 고난 속에서도 회개와 갱신을 통해 이전보다 더 강하고 영광스런 모습을 회복시켜주시겠다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루터기’에서 이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2.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26절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할 때 ‘큰 나무’가 베임을 당해 그루터기만 남았으나 이를 통해 왕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깨닫게 되면 이전처럼 견고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두루 왕도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겔 28:2)라고 교만할 때 하나님이 심판하셨습니다. 우리는 느부갓네살 왕의 모습을 통해 나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마치 ‘그루터기’만 남아있는 비참한 형편이라 할지라도 회복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대상 16:29) 돌리는 삶을 살 때 그루터기는 온전한 나무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3.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이웃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가난한 자는 오늘날 사회적 약자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고아와 과부’가 대표적인 약자입니다. 이들을 핍박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공의와 먼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공의를 행하고 긍휼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랑을 베푸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를 사하여 그루터기처럼 고난의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온전한 나무로 만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할 때 다시금 “총명과 위엄과 광명”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단 4:36). 마치 미가 선지자가 남은 백성들을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전 권능”을 회복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과 같습니다(미 4:8). 이처럼 그루터기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온전한 나무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ㅡ 그루터기紙 1899호

홍봉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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